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문단 편집) == 사건 이후 == > "소련에서 세운 그 모든 거창한 계획이 몇 년 전부터 왜 하나같이 실패했는지 이제는 알겠다. 결국 반역 때문이였다! 반역자들만 아니였어도 우린 진작에 이겼을 것이다. 이래서 역사 앞에 난 당당하다."[* 이언 커쇼는 이 발언에서 히틀러가 기라성 같은 게르만 영웅들의 반열에 자기 이름을 올려높고 싶어했다는 촌평을 했다.] >----- >암살 작전 실패 직후 '''이후 히틀러는 자신이 공언한 대로 처절한 복수를 단행했다.''' 히틀러는 암살 작전 실패 직후 "몇년 전부터 내가 하는 일에 발목을 잡아 온 놈들을 잡아냈다, 참모본부 전체가 오염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야비한 짐승들이 군복을 걸치고 다녔다. 오래전부터 번식해 온 이 무리들을 완전히 쓸어버려야 한다"면서 군부 지도자들에게 오래전부터 품어 온 뿌리깊은 불신감을 드러냈다. 히틀러는 "이 범죄자들에게는 총살형도 과분하다"면서 국방군에서 내쫓고 민간인 신분으로 법정에 세워서 사형을 선고한 후 두 시간 안에 처형해야 하며 절대로 봐주지 말고 바로 [[교수형|목을 매달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후 무려 7,0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체포되어 [[롤란트 프라이슬러]]가 주관한 인민재판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암살계획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암살계획과 무관한데도 한꺼번에 몰아서 숙청된 사람들도 있었다. 거의 대부분이 갈고리에 매달려 교수형을 당했고 프롬 장군은 불고지죄[* 계획을 알면서도 알리지 않았다는 죄.]로 1945년 3월 15일 총살형을 당했다. 프롬은 죽기 전에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차라리 배신하지 않는 거였는데"라고 후회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에르빈 롬멜]] 원수는 [[게슈타포]]의 수사에서[* 롬멜의 [[참모장]]을 지낸 [[한스 슈파이델]](Hans Speidel) 중장이 [[파리(프랑스)|파리]]의 [[슈바르체 카펠레|검은 오케스트라]] 그룹의 일원이었으며, 롬멜 본인에게도 검은 오케스트라 소속인 케자르 폰 호파커(Caesar von Hofacker) 공군 중령 등이 접촉한 바 있었다. 슈파이델 장군은 나치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으나 [[발터 모델]], [[하인츠 구데리안]], [[알베르트 슈페어]] 등의 도움으로 군사 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되지 않았다. 종전 후 서독 연방군 대장까지 진급하였고 NATO 중부 유럽 연합지상군 사령관을 지내면서 롬멜 신화의 정립에 앞장섰다. 슈파이델의 저서를 읽어보면 과도한 롬멜 추켜세우기로 다른 육군 장성들을 열심히 깎아 내린 것이 눈에 띄는데, 이 배경으로 슈파이델이 살기 위해 롬멜의 음모 사실을 밀고했던 죄책감 때문이라는 연구가 있다. 슈파이델 본인은 이미 그들이 먼저 롬멜의 가담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거기에 수긍한 것 정도라고 술회했지만, 실제로는 초기 심문 단계에서 롬멜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롬멜 부인은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히틀러 암살 계획 연루 자체를 부정하였고 슈파이델을 '배신자'라 칭하며 평생 만나지 않았다.]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는 식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롬멜 본인은 거사 며칠 전(7월 17일) 공습으로 부상을 입으면서 암살 계획의 실행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게슈타포의 보고를 받은 히틀러는 격노했지만, 롬멜이 국민적 영웅으로 존경받던 까닭에 히틀러도 롬멜을 멋대로 죽일 수는 없었다. 때문에 히틀러는 롬멜에게 사후에 국장을 치러 주고 가족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 하에 자살하든지, 반역자로서 재판을 받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결국 두 선택지 중 전자를 선택한 롬멜은 10월 14일에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였다. 최신 연구는 슈퇼프나겔의 진술이나 [[한스 슈파이델]]의 주장과 달리 롬멜이 히틀러 암살 계획에 적극 동참하지 않았다고 본다. 다만 [[귄터 폰 클루게]]와 함께 접촉은 하였다는 것은 게슈타포의 심문기록을 통해 확실히 밝혀졌는데 이때 접촉한 것도 슈타우펜베르크의 사촌으로 암살에 대한 내용조차 아니었으며 오로지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의 공세의 심각성과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이 결코 완전히 연합군을 몰아내지 못하고 결국엔 패망할것이라는 점을 확인한 정도였으며 이 둘 모두 히틀러에게 [[휴전]]을 요청해야만 하며 필요시 총통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말하였으며 슈타우펜베르크 사촌동생이 물은 총통에 대한 조치가 없으면 휴전이 불가능하다는것을 동의한 것 그리고 [[히믈러]]와 [[괴링]] 그리고 [[괴벨스]]가 히틀러가 휴전을 결정하는데 방해를 하고 있으며 이들이 총통의 식견을 막지 못하게 해야한다는 것을 동의,주장한것 까진 맞다고 한다. 다만 이때 말한 총통에 대한 조치는 히틀러가 휴전협상을 하도록하는 일련의 고위 장교들의 행동이지 히틀러에 대한 암살이 아니었다. 검은 오케스트라의 주도자 중 한 명인 [[헤닝 폰 트레슈코프]] 장군은 거사 실패 소식 후 어느 숲 속으로 운전병과 전속부관만 대동한 채 들어간 뒤, [[수류탄]]으로 자살했다.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Karl Rudolf Gerd von Rundstedt) 원수의 후임이자 롬멜의 상관으로서 서부전선 사령관을 맡았던 [[귄터 폰 클루게]](Günther "Hans" von Kluge) 원수도 패전 책임이 두려운데다 역시 암살계획을 알면서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발각될까 우려하여 롬멜에 앞서 8월 19일에 자결하였다. 암살계획에 가담했던 국방군 정보국(Sicherheitsdienst)장인 [[빌헬름 카나리스]](Wilhelm Canaris) 제독, 베를린 경찰청장인 경찰대장[* 나치당 창립 멤버 중 하나였다.] 볼프하인리히 그라프 폰 헬도르프(Wolf-Heinrich Graf von Helldorf) 장군과 제국사법경찰 사령관인 경찰중장[* 당시 독일 경찰은 친위대의 편제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경찰 계급과 아울러 친위대 계급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친위대원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아르투어 네베(Arthur Nebe) 장군, 육군 원수였던 [[에르빈 폰 비츨레벤]]도 처형되었다. 대표적인 민간인 반나치 인사였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목사[* 본회퍼는 [[빌헬름 카나리스|카나리스]] 제독 밑에서 민간 정보요원으로 활동했는데, 이는 은밀히 반나치 운동을 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잘못된 기차에 올라탔다면 복도의 반대 방향으로 뛰어봐야 소용없다"고 말한 사람이기도 하다.]도 체포되어 수용소에 투옥되고 2차 대전 종전 직전에 총살당했다. 히틀러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한 [[오토 에른스트 레머|레머]] 소령은 사건 종결 후 대령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1월에는 육군 소장이 되어 [[베를린]] 방어를 맡았다. 레머 장군은 전후에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당시 자신의 역할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아니, 후회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전후 '''네오나치 정당인 [[독일 사회주의 국가당|사회주의제국당]]을 창당했다.'''[* 결국 1952년 독일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되었다.] 그 후에도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책을 출간하는 등 각종 나치짓은 다 하다가 [[스페인]]으로 도피해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사건 이후 히틀러의 육군에 대한 불신감은 당연히 극도로 강해졌고 이는 육군과 [[무장 친위대]]의 대립에서 친위대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립이 끝나기는커녕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히틀러의 불신감에 불안감을 느낀 육군 인사 중 일부는 무장 친위대로 전군 신청을 하기도 하였다. 7월 20일 사건 이후 독일 육군 장교들은 '용의자'로 하룻밤새 [[게슈타포]]에 연행되어 사라지는 경우가 빈번히 발생하였고 누구든지 가족이 소환되어 조사받으면 이에 연루되어 끌려가는 상황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숙청의 파도가 몰아치는 가운데 히틀러는 암살자들을 처형되는 장면을 녹화한 필름을 자신의 벙커에서 상영하였는데, 대부분은 친위대 하급장교들과 민간인들, 드물게 해공군 장교가 섞여 있었을 뿐 육군 장교는 단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 사건의 최중요 인물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경우 형과 외숙부, 사촌 등의 친척들이 줄줄이 [[연좌제]]로 끌려가서 처형당했으나, 정작 슈타우펜베르크의 아내와 자녀 등은 전쟁의 혼란 와중에 도주해서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총살당할 당시의 에피소드로 본래는 마지막 순서였던 전속부관 베르너 폰 헤프텐 중위가 발포하는 순간에 사형장에 뛰어 들어서 둘다 동시에 사망하였다. 유언은 '우리 성스러운 독일이여 영원하라!(Es lebe unser heiliges Deutschland!)였다고. 슈타우펜베르크를 비롯해 즉결처분된 사망자들의 시신은 그 자리에 매장했으나, 이후 추모 분위기를 우려한 [[슈츠슈타펠|SS]]가 이 시신들을 다시 파내서 화장해 버렸다. 이 때문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비롯한 사망자들의 무덤은 없으며 총살 장소에 만든 추모비만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